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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번역원의 번역대학원대학교 설립 논의가 이뤄진 건 기존 통번역대학원과 다른 전문성과 철학을 지닌 제도권 교육기관을 마련하기 위함이다. 김 교수는 "기존 통번역대학원과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통역이 아닌 번역 분야만 전문적으로 다룬다는 점"이라며 "통번역대학원에도 일부 번역 과정이 있지만 대부분 외국어 텍스트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수업"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예를 들어)한강 작가의 작품을 (외국어)예술 텍스트로 재현할 수 있는 번역가는 정말 드물다"며 "특화된 전문 교육기관이 꼭 필요하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공동 발제자로 나선 최애영 한국문학번역원 번역아카데미 교수 역시 한국문학번역원의 기존'아카데미'가 '번역대학원대학교'로 도약해, 한국문학의 전문 번역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문학에는 한국인의 삶의 모든 차원에 관련된 과거, 현재, 더 나아가 미래의 지식까지 내포됐다"며 세계에 한국(인)을 알리는 도구로서의 문학번역을 강조했다.
AI(인공지능) 번역이 인간을 위협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선을 그었다. 최 교수는 "AI의 답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고, 판단은 늘 사용자 몫으로 남아있다. 그것을 짚어낼 줄 모르는 사용자라면 낭패를 볼 수 있다"며 "정형화된 표현을 파기하고자 문학번역과 통계에 의해 조합된 정형화되고, 상투적인 표현을 제시하는 AI 번역은 본질적으로 모순관계에 있다"고 짚었다.
다만 토론자로 참여한 마승혜 동국대 영어영문학부 교수는 AI가 인간 번역가의 역량 강화 수단으로 기능할 가능성을 제기했다. 마 교수는 김혜순 시인의 시 '쌍시옷 쌍시옷' 중 과거와 미래를 쌍시옷의 통일된 표현으로 드러낸 "었 겠 었 겠"을 AI가 "Was Will Was Will"로 번역한 사례를 언급하며 "AI가 제시하는 사례가 영감을 주는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외 이날 토론에는 ▲소설가 문지혁 ▲이구용 KL매니지먼트 대표 ▲이재원 카카오엔터테인먼트 타파스웹소설사업팀장 ▲정기인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교수 ▲조용경 전문번역가가 토론자로 참여했다.
<기억을 새겨드립니다>(2025년 5월 출간)는 이은정 작가의 세 번째 소설이다. 꾸준히 쓰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은정 작가는 소설가보다는 에세이스트로서 더 알려져 있다.
내가 아는 이은정 작가는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솔직하게 드러냄으로써 누군가의 마음을 토닥이는 능력이 탁월한 작가이다. 나는 작가와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는 아니고, 우연한 계기로 책을 읽은 뒤 그의 팬이 됐다. 28년차 사서인 내가 일하는 도서관에 강사로 초청해 북토크 강연을 하기도 했다.
피부에 새겨진 기억, 마음에 새겨진 위로
이 작가는 에세이뿐만 아니라 소설 속에도 한결같이 '상처가 회복되는 이야기', '나쁜 기억이 좋은 기억으로 덮어지는 이야기'를 담아낸다. 장편소설 <기억을 새겨드립니다>에서도 끊임없이 위로와 회복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어쩌면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자신이 위로받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은정 작가의 글을 읽다 보면 항상 작가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소설 속 인물 안에 자신을 투영시킨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다. 살기 위해서는 계속 쓸 수밖에 없는 절박한 심정이 글 속에서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렇게 솔직한 글을 쓰는 작가이기에 계속 응원하고 애정하게 된다.
작가는 책을 출간한 후 자신의 SNS에 당당히 홍보글을 올렸다. 예전에 내가 알던 이은정 작가라면 결코 시도하지 못했을 대범한 행동이었다. 상처가 많은 사람임을 잘 알기에, 앞으로 나서는 것보다 살짝 비켜서 있는 것이 마음 편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 모습을 보고 놀라운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쭈뼛대지 않고 정면돌파를 선택한 작가의 용기에 나마저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책 팔아 집세도 내고, '장군이'(작가가 키우는 반려견) 다리에 주사도 놔줘야 한다는 작가의 고백에 마음이 해사해졌다. 뭉게구름이 피어나는 느낌이었다.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싶다. "작가님~앞으로는 책 나오면 대놓고 홍보하세요. 평점 같은 거 신경 쓰지 마세요. 저는 작가님이 얼마나 치열하게 글을 쓰고 있는지 잘 아는 독자 중 한 명이니까 작가님 책이 나오면 무조건 살 거예요. 그냥 계속 쓰세요"라고.
가끔씩 그런 생각을 한다. 좋아하는 가수나 배우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아닌, 오로지 좋아하는 작가에 대해 이야기하며 흥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작가 이야기는 잠시 접고, 이제 소설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소설 속에는 간호사라는 직업으로 살아가다 그 일이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기억을 새겨주는 타투이스트로서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모리의 이야기가 고통의 편린처럼 잘게 부서진다.
작가가, 어떻게 보면 매력적일 수도 있지만 한편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로도 느껴질 수 있는 '타투'라는 소재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했다. 개성과 멋의 표현을 위해 타투를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상처를 숨기거나 가리기 위해 타투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누군가를 기억하기 위해, 그 시간을, 그 사람을, 그 감정을 잊지 않기 위해 타투를 한다는 또 하나의 이유를 이번 소설로 접하게 됐다. 그래서 어쩌면 '타투'가 누군가의 상처를 치유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겠다는 사실에 설득당했다. 대한민국에서는 '타투'가 여전히 불법적인 시술이지만, 꾸준히 성업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타투에는 그날의 기억까지 함께 새겨진다. 타투는 피부에 남아 눈에 보이는 기억이다.
- 타투이스트 해빗-
이은정 작가는 누군가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기다려줄 줄 아는 다정한 타투이스트를 소설 속에 등장시켜, 보수적인 생각과 선입견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주인공 모리(민정)를 과거에 자해와 상실의 늪에 가두었던 설정 역시 '기억을 새긴다'는 의미를 강조하는 데 있어 매우 효과적인 선택이었다. 읽는 내내 모리(민정)와 이은정 작가가, 읽는 내내 모리(민정)와 나 자신이 수시로 겹쳐졌다. 누구나 숨기고 싶은 상처, 가리고 싶은 흉터 하나쯤은 가지고 click here 살아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기억을 새긴다. 모든 사람이 좋은 추억만 가지고 오는 건 아니다. 상처를 새기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다. 증오나 복수 같은 의미가 아니었다. 자신을 가장 힘들게 했던 상처를 몸에 새겨 그걸 극복한 날들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이었다. 한마디로 살겠다는 의지. 좋은 기억을 입히면 추억을 곱씹으며 살고 상처를 입히면 극복한 자신을 곱씹으며 산다. 어느 쪽이든 살기 위해 나를 찾아온다(195쪽)
모리(민정)가 타투를 하면서 위로받고 치유받았던 것처럼, 자신도 누군가를 위로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 기억이나 추억을 복원해 주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 타투이스트라는 직업을 선택했듯이, 우리나라에서도 이제는 '타투'가 하나의 예술 분야이자 전문적인 영역으로 인정받았으면 좋겠다.
음지에서 비밀스럽게 활동하지 않고 당당하게 문화 예술 창작자로서 나설 수 있는 날이 곧 오지 않을까 생각한다.
더불어 한 가지 바람을 더 가져본다. 회복되지 않는 상처, 치유되지 않는 아픔, 여전히 욱신거리는 고통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독자들이 있다면, 이 책을 읽으며 '당신의 흉터가 좋은 기억으로 커버업 되기를, 마침내 회복하기를 빈다(245쪽)'라고 말하는 작가의 소망이 이뤄졌으면 하는 것. 그 말대로, 조금씩 변화하고 성장하면서 새로운 삶을 찾아 도전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전수용 번역원장은 "AI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는 지금 오히려 인간번역의 가치는 더 정교하고 본질적인 지점을 요구받고 있다"며 "이번 토론회를 계기로 대학원대학 설립을 통해 번역교육 체계를 제도적으로 전환하고, 한국문학과 문화콘텐츠의 세계화를 이끌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번역원은 2008년부터 운영해 온 번역아카데미의 성과를 바탕으로 석사과정 학위를 수여하는 번역대학원대학교 설립을 추진 중이며, 2027년 개교를 목표로 한다.